2015년 9월 12일 토요일

새로운 직장에서의 난해한 과제들


이직하고 나서 새로운 직장에서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이직하면서 몇가지 패널티를 안고 왔다.

(1) 원래 모시던 상사의 추천으로 입사.
(2) 주력 CAD 소프트웨어가 변경됨.
(3) 제품의 도메인이 변경됨.

때문에, 새로운 직장에서의 적응이 좀 더 어려워진 상황이다.

원래 4곳 정도의 사업체에서 러브콜을 주셨는데, 그중에 선택한 것이 지금의 직장이었다.
현재의 연봉보다 2배 가량 더 높은 금액을 제시해 주신 곳도 있었는데, 엔지니어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힘들 것으로 예상되고 또 외국을 너무 자주 나가야 하는 점 때문에 고사했다.

어쨌든 형식이 추천으로 입사한 것이다 보니 일부 사람들은 뒷담화로 '낙하산이다'라고 오해하면서 '실력도 없는게 나댄다'라는 식으로 나쁘게 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 주력 CREO에서 CATIA로 소프트웨어가 바뀌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CATIA 학습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당면한 긴급업무에 의해 짬을 내기가 쉽지 않아진 것도 있고, 또 십수년 전에 내가 CATIA를 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소프트웨어의 복잡도가 높아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CREO에서 적용했던 설계 기법들을 거의 그대로 원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약 4 주간에 걸쳐 틈틈이 학습한 결과, 표준에 맞추어 원하는대로 Setting를 완료하는데 성공했고, Top-down 설계를 적용할 수 있는 레시피를 얻었다.  몇가지 중요한 단축키의 사용에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다만, 실무 현업에서 보니까 CATIA 유저들의 설계기법이 생각보다 굉장히 원시적이라는데서 매우 놀랐다.  이렇게 좋은 툴을 가지고 이런 엉망진창의 데이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니...  헐.
기존 제품들의 설계 데이타들을 몇 가지 조금씩 뜯어보고 있는데, 소프트웨어 분야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일종의 '스파게티 소스코드'를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레퍼런스 로직도 엉망진창이고 원칙도 없고 일관성도 없고...  그냥 되는대로 모델링을 해 놓았으며, 도면 표준에 맞추었다는 셋팅도 보니까 제대로 안 맞는 것들이 많았다.  폰트도 중구난방...
선임자들의 변으로는, 너무 짧게 주어진 설계시간에 맞추다 보니 그렇게 흘러왔다는 것이다.  전임 경영자의 밀어부치기식 경영 습관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예전에 이런 식으로 전투기를 설계했었나 하는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해진다.

게다가 전임자들 및 현직 재직자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경험해온 경험이 최고수준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굴러온 돌은 믿을 수 없다는 티를 너무 노골적으로 내는 장면이 많았다.  조금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약간의 텃세 같은 것?
나를 기술적으로 전혀 신뢰하지 않는 시선이 느껴지는데 매우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지만, '엔지니어의 방식'을 통해 그런 점은 시간을 두고 쉽게 극복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기술적으로 오만한 엔지니어는 더이상 엔지니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자.

그건 그렇고 기존 제품의 설계 품질을 보니, 로직 측면에서의 저수준도 문제지만, 기구설계적인 기본 원칙이나 기초를 무시한 소위 '날림 설계'가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될지 멘붕이 올 정도다.
얼핏 보면 무슨 대학생 졸업작품인줄 알 정도였다.
(물론 그렇게 된 이유는 개발자의 자질이 낮아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는 개발자의 운신의 폭을 제한하는 제반상황, 영업조건 등의 영향이 크다.)

Top-down 계획설계 기법의 적용을 CATIA 유저들이 기피하는 경향이 굉장히 심하다.  매우 놀랍다.  바빠서 그렇다고 하는데, 아무리 바빠로 잘 적응되면 설계 생산성에 전혀 문제 없을 뿐만 아니라, 팔로우업 과정에서 점차 설계수정 소요시간이 단축되는 효과를 볼 수 있는데 이 친구들은 아직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어 보였다.

더 심각한 것은, 기존 재직 설계인원들의 타성이 심해서 어떠한 변화도 모두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점....  또 부하직원으로 함께 들어온 열 몇 살 나이 차이가 나는 친구가 나를 제대로 된 선배나 상사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자존감이 있어 보여 좋아 보이기는 하는데, 한번씩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볼 때는 등골이 오싹함) 등이 우려된다.
뭐하나 잘못하기라도 하면 당장 왕따라도 당할 기세다.

아무튼 이런 어려운 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역시 나로서도 부족한 점을 많이 느끼게 되었다.
특히 부족한 도메인 지식을 빠른 속도로 따라잡는 과제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할 것 같다.

또 나의 경상도 억양 때문에 간혹 받는 오해들(싸우는 말투 같다는 등)을 어떻게 이해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내 고향이 대구라는 점은 큰 패널티다.

아무튼,
이직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버린 것이 있다.

리더쉽에 대한 욕구를 버리기로 했다.
전 직장에서는 내가 이끌던 팀의 운명은 내 손에 달려 있었고, 그 때문에 팀원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면서 동시에 어린 친구들의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거의 주입식 교육을 실시했었다.
덕분에 그 친구들은 나름대로 실력의 향상을 맛볼 수 있었고 들어간 노력 대비 30% 정도 따라온다는 느낌을 받아 목표 수준을 충족했었다고 자평했다.
또 최소한의 자원으로 회사의 설계데이타 관리 시스템을 개선시키고 구축했다.

그러나 새로운 직장에서는 내가 리더쉽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 없다.
보통 엔지니어가 도메인 지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공학 실력의 한계에 도달할 때 정치적으로(말빨로)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꼼수이다.
그런데 나는 정치에 약한 타입이니...  상극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정치를 하지 말자고 매일매일 다짐한다.

일단은 당면한 일에 집중하고, 중장기적으로 목표한 시스템 컨스트럭션 작업은 속도 조절을 해서 늦춰 보기로 한다.

또 부하직원과의 협업량은 일단은 조금 줄이는게 현명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좋은 기술과 프로세스라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는 강요할 수 없으니....